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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2011. 12. 31. 00:35 | Posted by 너부리7

<홍길동전> 으로 유명한 허균(許筠)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 허초희(許楚姬)의 스물일곱 일생 중 결혼 이후의 삶에 중점을 맞춘 소설 <난설헌> 을 읽었다.

나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허난설헌의 본명이 허난설헌인줄 알았다. 그미(소설에 나오는 표현의 빌었다, "그미" 주로 소설에서, '그녀' 를 멋스럽게 이르는 말 - 표준국어대사전)의 본명은 허초희이고, 난설헌은 그미 스스로가 지은 자신의 호였다. 덧붙여 신사임당의 본명이 사임당이 아님을 알게 된 지는 좀 됐으나, 그녀의 본명이 신인선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지난 화요일 1100 에 출제된 문제를 보고나서였다.

난독증까지는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지 못하게 됐다. 물론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진득하니 첫 장부터 차례대로 읽기 시작하지만, 이내 싫증을 느끼고는 책의 중간부분을 펼쳐 읽은 후 곧장 결말부분으로 직행하여 읽어버린다. 그 다음 중간중간 읽지 않았던 부분을 찾아서 읽는 이상한 습관이 생겨버렸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난설헌> 은 처음 → 끝까지 순서대로 읽었고, 보통은 며칠씩 걸려 책 한 권을 읽는데 비해 이번에는 퇴근 후 이틀간 저녁시간을 이용해 금새 읽어버렸다. 그 만큼 최문희 작가의 글이 술술 잘 읽혔던 것 같다.

                                                <이미지 출저 : Yes 24>


세 가지 한(恨)이 있다는 허난설헌. 여자로 태어난 것, 조선에 태어난 것, 남편의 아내가 된 것이 바로 그것이란다. 그미의 한스러움이 참으로 절절하게 다가온다. 현재의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그미가 살던 시대에는 꿈조차 꿀 수 없는 것들이었으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축복받는 것일까? 예전에 아프리카 소말리아 출신의 슈퍼모델, 와리스 디리가 쓴 <사막의 꽃> 을 읽으며, 내가 아프리카에서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안도한 적이 있다. 뜬금없이 그 때의 일이 떠오른다.


哭子 (곡자, 아들딸 여의고서)

                                                                         - 허난설헌(許蘭雪軒)

去年喪愛女 (거년상애녀, 지난해에는 사랑스러운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 (금년상애자, 올해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다니)
哀哀廣陵土 (애애광릉토, 서럽고 서러워라 광릉고장에)
雙墳相對起 (쌍분상대기, 두 무덤 나란히 마주보고 만들어졌네)
蕭蕭白楊風 (소소백양풍, 백양나무 쓸쓸타 바람이 일고)
鬼火明松楸 (귀화명송추, 도깨비불 소나무에 비추이누나)
紙錢招汝魂 (지전초여혼, 지전으로 너희들 혼을 부르고)
玄酒尊汝丘 (현주존여구, 무덤에 맹물 한잔 부어놓는다)
應知弟兄魂 (응지제형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이야)
夜夜相追遊 (야야상추유,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노닐고 있으리)
縱有腹中孩 (종유복중해,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 하지만)
安可糞長成 (안가분장성, 어찌 제대로 자라날 수 있으랴)
浪吟黃坮訶 (낭음황대사,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血泣悲呑聲 (혈읍비탄성, 비통한 피눈물에 목이 맨다)

(최문희 장편소설 <난설헌> 에서 발췌)

정규 교육과정에 한문(漢文) 수업을 들었던 나이지만 다 까먹은지 한참인지라, 책에 한글 표기없이 달랑 한자와 해석한 문장만 나와서 한자 찾느라 고생 좀 했다. ^^;;


소헌과 제헌 남매를 연달아 잃고 난 후 허난설헌이 썼다는 시다. 꼬박 열달을 고이고이 제 몸에 품었다가 죽을 것 같은 산고를 거쳐 낳은 사랑하는 자식을 연달아 둘이나 앞세운 어미의 피눈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것도 소설의 내용으로 보자면 낳기만 하고 제대로 보듬어 보지도 못한 채 아이들을 잃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책을 읽으며 새삼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던 폐쇄적인 조선시대 속에서, 칠거지악(七去之惡, 조선시대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일곱가지의 허물,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 행실이 음탕한 것-淫, 질투하는 것-妬, 나쁜 병이 있는 것-惡病, 말이 많은 것-多言, 도둑질을 하는 것-盜)삼종지도(三從之道, 여자가 따라야 할 세가지 도리를 이르던 말, 시집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좇는 것을 이른다) 라는 지엄한 법도 아래 숨 죽이며 살았을 조선시대 아녀자들의 고된 삶이 느껴졌다. 누가 만든 말인지, 흔히 '여자의 적은 여자' 라고들 하는데, 가장 좋은 예가 바로 고부관계가 아닐까? 재력이 충분히 뒷받침 되어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당당한 양반가의 맏며느리인 허난설헌이 음식하고 바느질 하는 따위의 집안일을 할 것도 아닌데, 남아도는 시간에 좋아하는 서책을 읽고, 시를 썼다한들 그게 무슨 대수라고... -_-; 시어머니 송씨가 밉다.

소설 <난설헌> 속에서 허초희의 남편 '김성립' 은 좀 못난 사내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김성립' 이 어떤 인물인지 검색해봤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전사했고, 시신을 찾지 못해 의복만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부인 허초희와는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으며, 슬하에 자녀가 없어 양자를 들였다고 되어 있다. 이 정도가 전부다. 황사영 검색할 때처럼 집요하게 뒤지지 않아서 자료를 못 찾았을 수도 있겠지만... 의병을 일으켰다는 내용만으로 보자면 그리 못난 사내로 보여지진 않는데... 조선의 천재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허난설헌" 의 불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작가적 상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의 기록이란 것이 어차피 승자의 기록이고, 극히 일부분만이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것이니까, 대부분의 역사소설이 기록에 의한 사실에 기초한다 하더라도 작가적인 상상력이 많이 가미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허난설헌, 허초희의 "시" 뿐만 아니라, 그미의 인간적인 면도 궁금하다면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난설헌최문희장편소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최문희 (다산책방,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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